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마리 앙투아네트 (문단 편집) == 악명 == 마리 앙투아네트를 죽게 만든 가장 큰 이유라 일컬어지는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으면 되지]]"'''라는 [[망언]]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본인은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 원래 [[장 자크 루소]]의 <참회록>에 등장하는 말인데, 오스트리아 출신의 왕비라며 그녀를 비난하던 사람들이 여기서 따와 나쁜 소문을 퍼뜨렸고, 이것이 다시 혁명단에 의해 덧붙여지면서 '말도 안 되는 헛소리만 일삼는 멍청이'로 폄하된 것이다.[* 국내의 모 학습만화에선 '''"만화 [[베르사이유의 장미(만화)|베르사이유의 장미]]에 나오는 착한 앙투아네트는 구라임"'''이라고 역으로 구라를 쳐버렸다. 이 대사는 [[루이 14세]]의 왕비였던 [[스페인]]의 [[마리아 테레사(스페인)|마리아 테레사]]가 했다는 설이 있다. 그것도 세상 물정을 몰라서 한 말이라기보다는, 굶주린 백성들을 동정해서 '[[빵]]이 없다고? 그럼 어디서 [[케이크]]라도 구할 수 없을까?'라는 식으로 대책을 논의하는 말투였다고 한다. 마리아 테레사는 [[합스부르크 가문|가문]]의 고질적 [[근친혼]] 후유증 탓에 그리 영리한 사람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성품은 선량한 왕비였다는 의견이 사학계에서는 대세이다. 또는 [[루이 14세]]의 서출 딸이 한 말이라고 주장하는 쪽도 있다. 어찌되었든 간에, 일단 앙투아네트는 이 말을 한 적이 없으며 정작 이 말을 했다는 원조로 추정되는 여러 일화들도 "바보야,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으면 되잖아?" 라는 투라기 보다는 "빵이 없다고? 그럼 케이크(를 포함한 모든 부류)라도 먹게 할 수 없을까?" 라는 투에 가깝다.] 사실 그녀를 죽음으로 몰고 가는데 결정적으로[* 물론 진짜로 죽음으로 몰고 간 건 그녀의 잘못인 [[바렌 사건]]이 있다.] 기여한 것으로는 [[다이아몬드 목걸이 사기 사건]]이 있다. 라 모트 백작부인이 앙투아네트를 사칭해 거액의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편취한 이 사건에 앙투아네트가 관여된 것은 아니었지만[* 정작 앙투아네트는 "[[다이아몬드]]가 갖고 싶으면 사주겠다"는 [[루이 16세]]의 말에 "지금 우리 왕국은 다이아몬드보다 [[군함]] 1척이 더 필요하다"고 개념 넘치는 답변을 했다.], 대중들은 진범은 앙투아네트고 라 모트 백작부인은 이용당했을 뿐이라고만 믿었다. 라 모트 백작부인이 유죄 선고를 받자 일반 민중들의 여론은 더욱 격앙되었다고 한다. 다만 나중에 혁명 재판에서 확인해본 결과, 무고가 맞았다. 당대 [[프랑스인]]들은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성적인 모욕을 마리 앙투아네트에게 다 갖다 붙였다. [[동성애]], [[근친상간]], 하루에 수십 명을 상대한다든가 하는 등 주로 18세기 중반부터 널리 퍼지기 시작한 [[야설]]에 귀족, 특히 왕과 왕비를 많이 갖다 붙였는데, 당연히 주적인 마리 앙투아네트가 수많은 악성 창작자들의 펜 끝에 능욕당했다. 루이 16세의 경쟁자였던 [[루이필리프 조제프 도를레앙]]뿐만 아니라 상속후계자였던 두 동생인 [[루이 18세|프로방스 백작]]과 [[샤를 10세|아르투아 백작]]도 그러한 소문을 부추겼으며 프랑스 왕실을 증오했던 혁명가들도 그런 식의 야설들을 마구 써내서 출간했다. 당대에는 [[동성애자]]라는 소문이 퍼져 있었지만 이는 [[루머]]에 불과하며, 연구에 의하면 본인은 동성애자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아무튼 동성애자였다는 비난을 많이 받았던 관계로, 예전에는 동성애자들에게 고귀한 희생자로 추앙받기도 했다. 여담으로 사실 이와 비슷한 말을 정말로 했던 사람은 따로 있는데, 바로 [[서진]]의 2대 [[황제]]였던 [[혜제(서진)|진 혜제]] 사마충(司馬衷)[* 증조할아버지가 [[사마의]]이다. --대체 중달의 피는 어디로?-- ]이다. 흉년으로 백성들이 굶주리고 있다는 말을 듣고는 "'''곡식이 없다면 어찌하여 고기죽을 먹지 않는 것이냐?'''(何不食肉糜[* '하불식육미'라고 읽는다. 직역하면 '왜 고기죽을 먹지 않는가'])"라고 했다고 하는데, '''이는 엄연히 [[자치통감]]에 실려있는 사실이다.''' 다만 사마충은 [[백치]]라 판단력이 흐렸으며, 실제로 지적장애를 앓고 있었다는 추측도 나온다는 점은 감안할 필요가 있다. 어쩌면 중국에서 나온 이 이야기가 [[대륙]]을 횡단하면서 마리 앙투아네트의 말인 것처럼 변신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아예 불가능한 얘기는 아니다. 이미 프랑스 혁명 전에 진혜제의 일화가 기록된 [[자치통감강목]]이 프랑스어로 번역 출간되었기 때문이다. 일단 당시 프랑스인들이 진혜제의 일화를 접하는 것이 완전히 불가능하지는 않은 상태였다.] [[난임|오랫동안 아이를 낳지 못해서]] 비난을 받기도 했다. 현대인의 기준으로는 별 것 아닌 것처럼 보일 수 있으나, 봉건군주가 후사를 얻지 못하고 있다는 것은 꽤 심각한 문제였다. 전제군주정에서 왕의 후사가 없다는 것은 곧 국가적 혼란을 야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왕과 왕비의 사이가 소원하고 왕비가 무도회장을 누비며 밤을 보낸다는 것은, 호사가들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사실 이건 [[루이 16세]]가 부부관계를 기피하였기 때문으로, 그에게 일종의 성기능 장애가 있었다는 소문, 정확히는 자연포경이 아니라는 얘기가 돌기도 했다. 이 문제로 [[루이 15세]]가 특별히 [[의사]]를 불러 루이를 진찰하게 했고, 나중엔 친정 오빠 [[요제프 2세]]가 매제인 루이를 설득하러 프랑스까지 출동했다. 둘만의 대화라 모르지만 요제프의 말빨이 먹혔는지 결혼한 지 한참 뒤이기는 하지만, 다행히 마리는 아이들을 연달아 낳게 된다. 또 신혼 시절에 아이를 가지지 못했던 것이 마리 앙투아네트가 유흥에 빠진 원인이라는 설도 있다. 루이는 사냥이나 대장간에서 힘 쓰고 나면 밤에 충분히 자고, 남편이 잠든 시간에 마리는 파티에서 춤 추고 노느라 진이 빠져 아침이 되면 거의 기절해 잠들었다. 아내가 자는 동안 해 뜨면 루이는 다시 사냥이나 대장간으로 출근, 마리는 밤에 나가 아침에 들어와 둘 다 힘을 다른 데 쓰고 있었던 것이다. 여론은 루이의 성적 능력에 대한 의심과 앙투아네트의 (조작된)퇴폐적인 사교생활에 대한 관심으로 들끓었고, 이때 형성된 여론은 두고두고 족쇄처럼 그녀를 따라다니게 된다. 보다못한 [[마리아 테레지아]]가 서신을 통해 왕비로서의 몸가짐을 갖출 것을 타이를 정도로 당시 앙투아네트를 둘러싼 여론은 좋지 않았다. 어느 정도 나이가 들고 아이를 낳고 나서는 철이 들어서 유흥도 그만두었고, 왕비로서의 위치를 자각하여 왕실에 대한 지지를 회복하려고 노력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여론과 달리 마리 앙투아네트의 소비는 그녀 이전 역대 프랑스 왕비들보다 적었으며, 전체 프랑스 재정 상황에 비추어 보면 새 발의 피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